
나는 아직도 종이 노트 위에 글을 써 기록을 남긴다. 손글씨보다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 일상화됐지만, 나는 아직 종이 특유의 까슬한 질감을 포기하지 못했다. 꾹꾹 눌러 쓴 한 글자 한 글자가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될 때, 그 기억과 손끝의 감각은 오래도록 몸에 남는다. 무엇보다 내가 쓴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기록해 놓은 노트의 앞장부터 다시 되돌아가 읽어보면 적을 때는 떠오르지 않았던 통찰을 얻는 경우가 있다. 힘들거나 어려운 결정이 필요할 때, 노트에 적어 놓은 글을 읽으며 어떤 상황에도 첫 마음, 첫날을 기억하라는 초심불망(初心不忘)의 자세를 다진다.
은행원이었던 내가 맨손으로 회사를 차렸던 당시에도 사업 계획이나 경영 원칙 초안을 노트에 적었다. ‘사람에게 투자하고 함께 이루고 모두와 더불어 간다’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춘다’ ‘꿈, 창의 믿음, 도전, 실천을 기업문화의 기본 덕목으로 한다’. 어찌 보면 뻔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나는 이 지금도 이 문구들을 반복해서 쓰고 읽으며 실천하려고 노력 중이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은 ‘원하는 결과만을 얻기 위해 중요한 원칙을 생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웰컴금융그룹은 2002년 12월 9일 대부업체 웰컴크레디라인으로 첫발을 뗐다. 당시 영업자산은 3000만원 정도에 불과했다. 당연히 외부회계감사 기준에도 해당하지 않았고 회계감사 비용이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투명한 경영이라는 원칙을 세우기 위해 첫해부터 대형 회계법인에 조르듯 요청해 회계감사를 진행했다. 주위에서 과하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부업체가 흔치 않았던 시절, 고금리로 서민들을 착취한다는 선입견과 낮은 평판 등으로 영업 환경은 최악이었다. 그러나 3년여가 지난 2006년 미국 투자회사인 템플턴자산운용에서 550만달러를, 일본의 투자회사 AFC에서 10억엔을 투자받으면서 영업의 활로가 뚫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투자사들에 뭘 보고 거액의 투자를 결정했는지 물어봤다. 사업연도 1기, 단 20일을 회계감사 받은 걸 보고 투명한 경영을 하는 기업, 믿을 수 있는 사업이라는 평가를 내렸다고 했다. 손으로 적으며 다짐했던 경영 원칙이 빛을 발한 짜릿한 순간이었다. 해외에서 먼저 큰 규모의 투자유치에 성공하자 국내 금융사들도 조금씩 대출문을 열어주기 시작했고 빠른 속도로 영업을 확대할 수 있었다.
요즘 노트에 가장 많이 쓰는 문구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다.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다. 웰컴저축은행은 2018년 저축은행 업권에서는 최초로 디지털금융 플랫폼을 열었고, 다운로드 수가 330만회를 넘으며 모바일 부문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이걸로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그룹 내 계열사인 자산운용, 캐피털, 렌털, 페이먼츠, 벤처투자 등을 모두 디지털로 전환시켜 디지털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과제다. ‘디지털화’라는 목표를 손글씨로 적으며 다짐한다는 것이 좀 겸연쩍은 일이긴 하지만, 초심과 결의를 다지는 데는 여전히 이것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다.
